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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시작

거의 빈 극장. 불 꺼진 객석과 환하게 빈 스크린.
불이 꺼지면, 무언가 시작된다.

3월 14일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에는 더 잔다. 여덟 시, 아홉 시까지. 푹 자둬야 월요일이 잘 굴러갔다. 늘 그랬다.

그날은 일찍 깼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한참 누워 있었다. 그러다 아이폰을 들어 달력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전날까지는 빈칸이 없었다.

하루 전, 금요일이었다. 그날 오전에도 회의가 있었다. 매주 하던 정기 회의였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인사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잠깐 보자고 했다.

인사팀장과는 몇 년을 같이 일한 사이였다. 그래서 전화를 끊기 전에 물었다. “제 해임 건인가요?” 그렇다고 했다.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본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적지 않겠다. 마지막에 내가 한 말만 기억난다. 맡은 일을 거의 끝내가던 참이라고, 마무리가 중요한데 그게 아쉽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늘 목록에서 시작됐다. 아침에 Things를 열어 그날 할 일을 적고, 회사에 도착하면 메일함을 비웠다. 메일 하나하나가 일이 되어 목록으로 들어왔다. 하루에도 수십 개를 그렇게 처리했다. 적고, 끝내고, 지웠다.

이걸 GTD라고 부른다. Getting Things Done. 할 일을 목록으로 만들고, 처리하고, 넘어가는 것.

목록에는 늘 한가운데가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의 임원 회의. 한 주가 그 회의를 향해 굴러갔다.

위에서 내려오는 말은 늘 셌다. 그게 세기만 하면 조직은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말에도 힘을 실었다. 회의 전까지 한 주 내내, 위와 아래의 균형을 맞췄다. 누가 시켜서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사실을 보고 있도록.

개발자로 시작해 CTO가 됐다. 20여 년이 걸렸다. 그사이 목록에 적히는 일은 계속 바뀌었지만, 적고 지우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 리듬으로 살았다.

무엇에 곧장 뛰어들고 무엇을 지켜볼지. 급한 경고인지, 그냥 지나갈 소음인지. 나는 늘 그렇게 가늠하며 결정해왔다.

그런데 내 해임은 그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도 그랬다.

누운 채로, 머릿속은 벌써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연락하기. 헤드헌터 선정하기. 채용 플랫폼 알아보기. 단기 일감 찾기. Claude Code로 직접 앱 만들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목록이 바뀌었을 뿐, 몸은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내 페이즈를 유지해야 한다. 자꾸 그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목록 끝에 항목이 하나 더 있었다. 개인 웹사이트 구축.

개인 웹사이트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다. 회사에 매여 있는 동안은 어려웠다. 다루는 정보가 많은 자리라, 개인 사이트를 여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일주일을 넘겨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공백은 처음이었다.

쓸 거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 다닌 회사를 나온 뒤로, 변화가 필요한 회사들을 옮겨 다녔다. 바깥에서 이미 한참 앞서가는 것들을 찾아, 안으로 들여오고, 자리 잡게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보고 배우고 해본 것이 쌓여 있었다. 그걸 쓰고 싶었다. 그게 내가 생각한 웹사이트였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매일 새로운 소식이 쏟아졌다. 나는 그걸 한국어로 정리했다. AI를 써서, 하루에 서너 편, 많으면 다섯 편씩.

처음 스무 편쯤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AI에 내 화법을 입혔더니, 내가 봐도 제법 나 같았다. 주제를 열 몇 갈래로 나누고, 갈래마다 틀을 따로 짜뒀다. 글의 모양이 다양해 보였다.

글이 많아지면서 그게 무너졌다. 다양해 보이던 모양이 하나로 수렴했다. 어떤 글을 열어도 한 사람이 한 틀로 찍어낸 것 같았다. AI가 다 쓴 게 티가 났다.

글은 쌓이는데, 아무것도 쌓이는 것 같지 않았다.

같은 소식은 이미 사방에 있었다. 내 글은 그것들보다 더 자세하지도, 더 쓸모 있지도 않았다. 아무도 내 글을 찾지 않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새 기술과 소식을 들여다보는 건 좋았다. 어차피 내가 읽는 글이었고, 영어를 보는 것도 내 할 일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게 매일의 목록이 되어 주었다. 빈칸이 채워졌다.

페르소나를 바꿔도 봤다. 틀도 더 늘렸다. 개선하면 나아지겠지, 했다.

시간이 좀 지났다.

Search Console를 보면 인덱싱은 잘 됐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글은 사람들에게 거의 닿지 않았다. 보이지도, 눌리지도 않았다. 같은 내용이 이미 세상에 너무 많았다.

AdSense는 심사에 오래 걸렸다. 그리고 떨어졌다. thin content.

둘 다, 내 글에 생각이 없다고 말해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부인하긴 어려웠다. 쉰 편쯤 넘어가면서, 나는 하루 서너 개를 기계적으로 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내 생각을 넣으려고 꼼꼼히 들여다봤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확인마저 놓아버렸다.

말투는 내 것이었다. 글은 나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안에 내 생각은 없었다. 내 목소리로 세상의 뉴스를 옮겼을 뿐이었다.

130편을 쓰는 동안, 내가 쓴 문장은 거의 없었다.

이 사이트를 다시 만들었다. 이번엔 내 생각이 들어간다.

뉴스를 옮기지는 않는다. 매일 보는 것들 위에, 내가 직접 겪은 걸 한 조각씩 얹는다. 그렇게 글감을 모은다.

지금 쓰고 있는 첫 조각은, AI가 일을 어떻게 바꾸고 무엇을 대체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오래, 나는 그 변화를 회사 안으로 들여오는 쪽이었다. 이번엔 조금 다른 자리에서 쓴다.